1회 입학 김수식 명예교수 초청강연

개교70주년 기념, 모교 본관 현경홀서 열려
신소재 교수, 동문, 재학생 등 100여명 참석
이준삼 동문… 2대 동창회장으로 바로 잡길
첫 장학금 조성, 박정희·조중훈 관계 설명
이승만 박사가 만든 ‘인하대·자유 대한민국’
1회 입학 김수식 명예교수 초청강연 총동창회(회장 김두한·영문82)는 9일 오후 금속공학과동문회(회장 임영진·80) 주관으로 개교70주년 기념 1회 입학 김수식(금속54) 명예교수를 초청 ‘인하와 함께한 70년’을 주제로 특별강연회를 개최했다.
우리 대학 본관 현경홀에서 임학성(사학80) 사학과 교수의 사회로 진행된 강연회에는 신소재공학과 교수, 동문, 재학생 등 10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김수식 명예교수는 9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2시간에 걸쳐 총동창회와 모교의 발전 과정에 이어 초창기 인하학원의 변천과정 등을 설명했다.
김 동문은 1958년 제1호 졸업장을 받았으며, 조교로 임용된 후 일본 동경공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63년 교수로 임용돼 후학 양성뿐만 아니라 대한금속재료학회장을 역임하는 등 금속분야 발전에 기여하고 1998년 2월 정년퇴임했다.
이날 김 교수는 총동창회의 출범과정을 설명하면서 총동창회장에서 누락된 이준삼(화공54) 동문을 제2대 회장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총동창회가 1959년 11월 15일 출범한 직후 4·19, 5·16으로 이승만 정권이 무너지면서 재단 이사회의 혼란, 1970년 첫 장학금 조성,
총동창회의 재학생 입회금 수납에 얽힌 이야기 등을 소개했다.
또 초창기 인하공과대학시절 역대 학장들의 역할과 업적,초창기 정원 미달을 감수한 학생선발, 유급·퇴학 등 엄격한 학사운영 제도 등을 설명했다.
이어 박정희 대통령과 조중훈 이사장에 얽힌 재단 인수과정 등의 야사도 소개됐다.
특히 김 교수는 “이 세상에 이승만 박사가 없었다면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바로 인하대학과 자유대한민국”이라며
“이 박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고문 역할을 하고 미국서적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를 저술한 로버트 올리버 박사에게도 존경의 마음을 갖게 된다”고 평가했다.
이날 개회식에서 김두한 총동창회장은 환영사를 통해 “민족부흥의 소명을 구현한 선배들의 뜻과 명예를 계승하고 모교 발전과 후진육영에 더 노력하겠다”면서 “영광스러운 창학을 이어오며 우리 대학 발전에 기여하신 김수식 선배님의 강연이 인하 미래의 새로운 발판으로 새겨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장석철(금속71) 전 총동창회장은 “김 교수님은 30년이 지나서도 제자를 기억할 정도로 학교와 학생에 대한 사랑과 열정이 넘치시는 은사”라며 “개교 당시 출범한 기계·금속·광산·화공·조선·전기공학과 중 총동창회장이 없는 학과가 금속이라며 회장을 맡으라고 권유하셨으며 자기관리에도 철저하신 선배이고 은사님의 가르침대로 모교가 더욱 발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금속공학과는 1988년 무기재료공학과를 통합해 신소재공학과로 학과 명칭이 변경됐으며, 6500여명의 졸업생이 배출됐다.
<김수식 명예교수 초청강연 요지>
“장구한 모교 인하대학의 역사를 오늘의 시점에서 돌아보고
미래의 역사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란다”
우리 인하대학교총동창회는 1959년 11월 15일 창립됐다.
1954년 1회 180명이 입학해서 124명이 졸업했고, 2회는 55명이 졸업했다. 이 중 30여명이 모여 동창회를 결성했다. 초대 김우경 총동창회장은 당시 나이가 가장 많았다.
그러나 지병으로 요양 중 세상을 떠났다. 총동창회는 학교 인근의 중식당(대려도)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이준삼 동문을 신임회장으로 선출했다.
곧이어 4·19, 5·16이 일어나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하고 초대 이기붕 이사장은 가족의 비운으로 별세했다. 대부분 정부 요직의 각료로 구성됐던 이사회 이사들은 다 그만두고 최승만 학장과 표양문 인천시장만 남게 됐다. 학교와 박흥식 흥한방직 회장이 교섭하고 있었는데 이사장을 두고 학교와 재단, 총동창회가 찬·반으로 갈라져 극심하게 대립했던 시기이다.
이준삼 동문, 2대 총동창회장으로 기록돼야 1965년 첫 재학생 동창회 입회비 수납, 이사장 영입 문제로 재단과 대립했던 조교 이준삼 동문은 사표를 내고 공고 교사로 이직했다. 교사로 가더라도 회장은 회장인데 역대 총동창회장 역사에서 누락돼 바로 잡길 바란다.
경제적 지원이 전혀 없던 총동창회가 1965년 처음으로 재학생 입회비를 받게 돼 형편이 폈다. 신입생이 입학금을 낼 때 별도로 일정금액을 은행에 예금하게 되면 졸업할 때 이자를 붙여주는 정부시책으로 졸업 시 찾게 되는 돈에서 입회비를 수납하게 됐다.
1970년 인관석 부회장이 하와이교포기념관(현재 실내체육관)에서 만나 동창회 사무실을 이전하며 정리한 108만원을 장학기금으로 주고 갔다. 조선공학과 정태준 교수와 상의해 이른바 고리대금을 해 1972년 첫 전액장학금을 1학년 최고 성적을 올린 학생에게 지급했다. 당시 16만원 정도로 시작된 장학금 지급액이 현재까지 누적 65억원 정도로 성장했다.
1980년도 와서 동창회 예산은 입회비 외에는 거의 없었다. 단과대학에서 종합대학으로 성장하면서 학생이 늘고 회비를 받기 시작해 예산이 확보됐다.
하지만 입회비를 걷기가 매우 힘들었다. 1979년 출판부장 보직을 맡았고, 1980년도 1학년 신입생 도서를 출판해서 배부하고 당시 이재철 총장에게 결재를 받으러 갔는데 이 총장이 재학생이 동창회 준회원이라고 하니까 도서비 납입증서에 동창회 입회비를 포함해 받게 할 수 있도록 결재해줘서 생각지도 않은 큰돈이 들어오게 됐다.
1980년대 들어 회비 규모가 확 늘어난 이유이다.
1 · 2학년 퇴학, 3 · 4학년 유급제도 엄격 시행
서울대 교수 겸직 채용, 높은 보수로 대우
총동창회 장학금은 1972년 인하대동문장학회 위탁장학금을 비롯해 2000년 후배사랑동문장학금, 2016년부터 학교위탁장학금 등이 운용됐다.
초대 이원철 학장은 중앙기상대장을 겸직했다. 학점제, 학년제를 겸용하는 학사제도를 시행했다. 1학년과 2학년은 성적이 미달되면 유급이 아닌 퇴학을 당했다.
3, 4학년은 유급제도가 있었다. 공학을 전공하기가 부적합하니 다른 전공을 찾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교육적 권고의 의미였다. 또 출석일수가 미달되면 좋은 성적을 받아도 퇴학 또는 유급됐다. 공대 학생들이 정서가 메마를 수 있다고 해서 음악이 교양과목으로 개설됐다. 출석만 되면 학점이수를 인정해 주는 과목(Pass & Fail)이었으나 출석 때문에 유급, 퇴학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관학교의 교육체제와 같았다는 생각이다.
유명 교수 대부분이 서울공대 재직 교수였는데 이 중 권위 있는 원로교수들이 인하공대에 겸직 채용됐다. 대학이나 정부기관에 없던 보너스 제도를 시행할 정도로 높은 보수로 대우했다.
초대 이원철 학장은 임기 중 매년 공학관을 순차 건립했다. 기계공학관, 화학공학관에 이어 내가 3학년 때 전기공학관이 들어섰다.
1972년 108만원 기금이자로 첫 장학금 지급
일장기사건 동아 최승만 주필, 2대 학장 취임
2대 최승만 학장은 애국자다. 2·8 독립선언 발표의 주동자이고, 동아일보 주필로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선수와 관련된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1936년 조선총독부는 동아일보를 정간 처분했으며 최 주필도 파면됐다.
또 국내에서 직장을 못 구하니까 만주에 갔다가 해방돼서 연희대학 교수, 제주대학 초대 학장, 이화여대 부총장 등을 지냈고, 피란정부에서 제주도지사였다.
이기붕 이사장과 보성고등학교 동기였다.
이원철 초대 학장 시절인 1959년 원자력공학과와 병기공학과가 증설돼서 입학정원이 180명에서 255명으로 늘었는데 성적 커트라인을 둬서 정원을 채우지 않았다.
이유는 학부모가 소·땅 팔아서 대학 보내는데 1년 후에 퇴학당하게 되면 어떤 심정이겠냐며 일정 성적이 안 되면 불합격시켰다. 그래서 정원의 반도 채우지 못하는 학과도 있었다. 등록금 수입이 절실한 때인데도 정원 미달 대학운영을 했다.
3대 김장훈 학장은 재임 1년 동안 전임 학장들의 학사운영 시스템을 이어 발전시켰으며, 체신부장관으로 영전했다.
이후 대학의 운영 방안을 개선하기 위해 증과·증원하는 방향으로 학사운영이 확대됐다. 병설 초급대학도 신설해 모든 학과를 두고 대규모 신입생이 들어왔다.
야간대학인 2부대학도 신설됐다. 이 때 엄격했던 학사관리의 전통이 무너지고 학교에 많은 변화가 왔다.
1960년대 중반, 연 · 고대, 성대 등 공대 신설
인하공대, 교수 스카웃 중심 돼 대부분 떠나
1960년대 중반 우리 사회에 산업 붐이 일어나고 공업인력양성 움직임이 확대되면서 공과대학이 우후죽순으로 들어서게 됐다.
공과대학이 없던 연·고대 성균관대 등이 공과대학을 신설하던 시기이다. 한양공대도 확장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교원 자원은 인하공대 교수뿐이었다.
나는 1965년 4월에 일본 동경공대에 가서 1967년 11월 초까지 2년 7개월간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금속공학과 교수 정원 4명 중 나를 제외한 세 분은 은사였다.
한양공대로 모두 옮겨 가셨다. 다른 교수들이 금속공학과에 왔지만 1년 반 사이에 연세대로 또 2명이 갔다. 화공, 기계, 건축공학과 등도 재직 교수들이 연세, 고려, 성균관, 한양공대로 떠났다. 그 때 힘없는 교수들만 남았다고 한탄하는 분위기였다.
5대 학장으로 박철재 박사가 왔는데 부동산으로 돈을 많이 번 재일교포가 새 이사장으로 내정이 됐다. 이미 1년 전인 1964년 이 분이 추천한 사람이 학교 사무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을 정도여서 학교 이사진하고 충분한 교류가 이뤄졌다고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일본에서 돌아와서도 재단 이사장은 바뀌지 않았다.
1968년 10월 한진상사 조중훈 사장이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월남전에서 하역사업을 해 돈을 많이 벌어서 걸어 다니는 은행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소문이 났다.
조 사장은 국영 대한항공공사를 인수하고, 박정희 대통령의 권유로 인하학원을 맡게 됐다.
조중훈, 박정희 대통령 권유로 인하학원 인수이승만 없었다면 인하대 · 자유 대한민국 없다
간혹 성공한 동문이 많아도 동문회 운영이 실패하는 경우도 있다. 리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인하대총동창회는 공과대학에서 출발해서 다른 대학보다는 자립하기까지 긴 시간이 소요되고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운명을 타고 났다.
이런 상황에서 65년의 역사를 이어오며 총동창회 발전에 헌신한 역대 회장들에게 감사한다.
우리의 삶은 먼저 부모가 길러준 신체를 기반으로 사회에나가게 된다. 사회에 적응하려면 모교에서 잉태한 지식이 있어야 한다.
결국 모교와 큰 사회로서 조국 대한민국은 우리의 공통분모이다. 만일 이 분이 없었다면 모교 인하대는 이 세상에 태어날 수 없었다. 바로 그 분이 이승만 박사다.
또 자유 대한민국도 이 박사가 없었다면 지구상에 존재할수 없다. 모교 인하대의 존재는 동문인 우리가 주장할 수 있지만 자유 대한민국은 세상이 증명하는 일이다.
미국에서 <이승만 없었다면 대한민국 없다>를 로버트 올리버 박사가 발간했다. 한글 번역서적도 간행됐다. 로버트 올리버는 이 박사가 독립운동을 할 때부터 고문 역할을 담당했다. 이 박사가 귀국해서도 대사관을 통해 서신을 주고받았다. 서신이 책자의 주요 내용이다.
북한과 같은 비참한 나라도 있다. 나는 이 박사가 설립한 인하대학과 평생의 인연을 맺은 것에 감사한다. 이승만 없었다면 인하대 없다.
인하대 없었다면 나는 없다. 그래서 모교와 조국을 있게 해준 이 두 분에 대해 감사함을 드린다.
<인하동창회보 256호 1, 2면 기사 전재>
